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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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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문화재단의 화요명작예술감상회는 2월 연극이야기, 3월 가곡이야기, 4월 미술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은 그림 속 예술가의 연인들이 주제다. 예술가의 애인은 그림 속에서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까. 


이번이 두 번째 강의를 들으면서 바로 받아쓰기 작성하고 있다. 



사랑에 대한 풍속도가 많이 바뀌었다. 간통죄 폐지 이후, 처음 반대했던 사람들이 여자들 쪽이었는데, 요즘 폐지 이후 불리해진 쪽은 남자다. 황혼기 이후 버림받는 남자들이 늘다보니. 버림받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남자들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먼저 르노와르와 아내 알린 얘기부터. 르노와르는 많은 여성을 그렸다. 하지만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 당시의 문란했던 예술계의 풍속에 비춰보면 가정에 충실했던 자상한 아버지였다.


인상파 그림이 우리나라에 와서 실패한 적이 없다. 



모딜리아니와 잔느.



모딜리아니는 대부분 그림에서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는데 잔느 그림에는 몇점에 눈동자를 그려넣었다. 화면 속 1920년 1월 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반려. 이것은 잔느의 묘비명 글귀.


당시 가난한 화가들은 모델을 구할 형편이 못돼 직업여성을 모델로 많이 대상화했다. 모딜리아니 여성에게 많이 인기가 있었다고.


다음은 페이퍼에 소개된 이야기.


대부분의 초상화에서 '사람의 눈'을 그리지 않는 작가로 더 유명한 모딜리아니는 1917년 32세의 나이로 당시 나이 16세의 잔느 에뷔테른과 열애를 시작했다. 당시 모딜리아니는 술과 향락에 젖어 주정뱅이 화가라고 손가락질 받았지만. 잔느와의 생활에서 그는 매우 다정다감한 연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모딜리아니는 살면서 단 4점의 풍경화만을 유화로 남겼고 나머지 작품은 모두 젊은 여성들을 모델로 한 초상화와 누드화였다.


특히 잔느 웨비테른이 모델인 것으로 알려진 '목이 긴 여인'은 오늘날 모딜리아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목이 긴 여인을 포함해 다수의 작품에서 모딜리아니는 눈동자가 있는 잔느의 모습을 그렸다.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



로댕은 많은 조각가들을 조수로 두고 있었다. 카미유도 마찬가지. 로댕은 이사도라 덩컨과도 염문이 있었다. 


영화에선 감각적인 부분 담아. 카미유 클로델 영화는 당시 예술인들의 열정, 직업 정신을 보여주었다. 


창원 조각도시. 문신, 김종영, 김영원, 박석원, 박종배 등 유명 조각가들이 이곳에서 탄생, 활동했다.


지금과 달리 당시 로댕 시대엔 인체를 대상으로 만들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인체는 필수적으로 다룬다.


이 시대엔 재로도 석고 아니면 대리석, 브론즈였다. 브론즈는 아직 기술이 낮은 상태. 


문신 조각. 문신 선생이 직접 그 많은 스테인리스강을 두드려서 만들었겠느냐. 조각가들은 감독이라고 보면 된다. 조각에서 원작 부분은 조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예술가의 손이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영역이 있다 보니 실제 조각가의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 제법 있다. 공장에 넣고 만들어지는 과정.


조영남의 대작. 큰작품이 아니라 대신해서 만든 작품. 유명한 작가들이 직접 그리느냐? 그 많은 작품을 어떻게 그려낼까. 


로댕의 작품도 카미유 클로델이 만든 것이 있다 보니 그건 그려면 로댕의 작품이냐 카미유의 작품이냐. 로댕의 지시에 의해 카미유가 만들었으니 그것은 로댕의 작품이라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조영남의 작품은?


어느쪽이 옳다 그르다 하기 어렵다. 


황 교수도 조각 작품을 할 때 공동작업도 했고 공정에는 석공이 작업하기도 한다. 로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공장에서 함께 작업을 하면서 조수와 스승의 입장, 제자와 스승의 관계라면 그런 일이 없을 텐데 로댕과 연인관계가 되면서 정신병원에 가게되고 결국은 요절하게 되었다.


남성 위주의 사회 분위기에서 피해를 본 대표적인 인물로 카미유 클로델이 거론된다. 카미유가 로댕에게 버림받고 난뒤 드뷔시와 사귀게 되는데... 이 속에 복잡한 관계가 형성된다. 당시 유부녀도 그런 상황에 자유로웠다.


클림트와 아델레 블로흐



클림트는 여러 계층의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상류층 유부녀와는 염문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아델레와는 깊은 관계에 빠졌다. <우먼 인 골드>가 클림트 관련 영화였구나.  


이 그림은 1700억에 판매됐다고.


우리나라에도 연예계 베르테르 효과도 있지만 이러한 상황에 국가가 나서줘야 한다.


한국에서 살려면 부자인 척 하라. 이런  말이 있다. 


한국, 부의 정도에 따른 만족도는 너무 떨어진다.


학교 학과명 '두산중공업과'


다음은 페이퍼 내용.


독신이었던 클림트가 죽었을 때 14건 이상의 유자녀 양육비 청구 소송이 제기되었고 이중에서 4건이 받아들여졌다. 클림트는 직업모델들과는 육체적 관계를 맺었지마 ㄴ상위계층 신분의 여성들과는 프라토닉 사랑만 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상류층이었지만 관능적인 포즈와 육체적인 사랑도 함게 했다.


클림트가 죽은 이듬해 자신의 집에 클림트 홀으 ㄹ만들었고 6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페미니즘, 여성주의, 남성주의 반발에서 나왔다는 점도 있다. 화면에 설명되었듯이 프리다는 22살에 스승 42세의 리베라를 만나 결혼했지만 유산과 불륜, 이혼, 재결합 등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러한 것을 작품에 반영했다.


당시 프리다가 원했던 것은 '작가'로서의 자존심이었는데 한 남자의 아내, 여성이라는 존재로 자신을 바라본 것에 불만이 많았다.


마리 로랑생과 기욤 아폴리네트



배경은 미라보다리. 그림에는 피카소도 등장한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 미라보든지 센강이든지 유럽의 명소는 아주 좋을 것 같은데, 직접 가서 보면 실망하게 된다. 남의 것에 대한 환상이 작용해서 그럴 것.


마창진 통합 착시효과. 땅값만 엄청 올라. 콰이강의 다리 이야기까지.



피카소의 연인들



피카소는 연인이 너무 많아 특정인을 내세울 수가 없겠다. 옛날엔 화가들뿐만 아니라 문인들도 스캔들이 비일비재했다. 예전엔 대학교수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요즘은 다르다. 


피카소, 친구의 여자 뭐 따로 없었다. 눈에 띄면 친구의 여자든 다 스캔들을 일으켰다. 


게르니카를 그리게 만든 원인 제공자는 도라다. 도라를 그린 작품은 모두 1000억이 넘는다. 피카소는 시류를 아는 사람이었다. 어떤 것이 돈이 되는지를 알았다.


피카소 92살까지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주변의 여성들은 대부분 불행했다. 80세에 만나 피카소를 버린 사람은 프랑스와즈 질로(화면에서 머리 풍성한 사람)다. 피카소는 한 여자를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끊임없이 다른 여자를 만났다. 호색한이다.


피카소 그림 중에 졸거나 자고 있는 그림은 모두 비싸다. 영화 은교에서 교수가 은교에게 반하는 장면이 의자에 기대어 자고 있는 모습.


예술가들에 대해선 관대하게 바라보는데 왜 우리 사회에선 홍상수와 김민희에 대해선 못받아들이는가. (수강 어르신의 질문, 황 교수의 의견은?) "자유로운 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데 명성 때문에 지탄을 받는 것 아닌가 본다. 애증에는 왜 편식하는가? 15년 독점 기한을 둔다면. ㅋㅋㅋ


예술인의 여성 편력, 자유 연애, 스캔들.... 미술과 현실을 오가며 재미있게 진행된 강의였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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