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 말만큼 쉬운 건 아니지만
예전에, 몇 년도였는지 기억이 아슴아슴해서 적시해 말은 못하겠다만, 극단 마산에서 이만희 작품 ‘그건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란 연극을 한 적이 있다. 그걸 보려고 벼르고 별렀건만 결국 무슨 이유로 보지 못하고 말았다. 작고한 김태성 씨가 등장했던 작품이었다.
그게 그렇게 아쉽고 서운하고 해서 다음에 ‘목탁’ 공연이 있으면 봐야지 했던 게 희한하게 그것도 시기가 지나고 나니 식어버린 라면처럼 관심에서 멀어져버렸다.
최근에 다시 문화 관련 기사를 인터넷 여기저기서 뒤지게 되었는데, 물론 일 때문에, ‘목탁’이 눈에 들어왔다. 은근히 가슴에 불이 댕겨지더니 희곡이라도 읽어야겠다는 욕심이 발동했다. 도서관에 책이 있었다. 이래서 도서관이 좋은 거다. 1년간 내가 책을 몇 권 읽는지 말고 빌리는지 통계를 내보면 재밌겠단 생각도 든다. 각설.
책을 읽다가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다. 이 부분 도법 역을 맡은 배우는 어떻게 연기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도법 : 그래 난 범부야. 속인이구 죄인이구 머저리야. 물론 내 처는 아무 잘못도 없어. 그걸 나도 알아. 이치상으로 확실히 그래. 하지만 난 그 일을 지울 수가 없어. 지우려고 노력이야 했지. 잊어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저 여자나 나나 불행해진다고. 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어. 버선 코빼기만 보아도 그 일이 떠오르는 걸 낸들 어쩌란 말이야. 어떤 놈이든 붇잡고 물어봐. 지 마누라가 강간당하는 걸 보고 저건 色이요, 저건 空이니 집착하지 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겨버려라. 어떤 미친 놈이 그대로 따르겠어. 없어. 그런 놈은 세상에 없어.
망령 : 왜 없어. 쌔구 쌨어.
도법 : 그런 자들은 인간이 아니야.
망령 : 인간이야. 그런 썩은 동태눈알 가지고 무슨 도를 닦겠다고 그래. 이놈아. 너와 마누라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건으로 똑같이 당했어. 둘 다 시궁창에 빠진 거야. 그런데도 너는 말짱하고 마누라만 더럽다 이거야?
도법 : 불리지 말어. 난 그 일을 말갛게 지울 수가 없다는 것뿐이야.
망령 : 누가 말갛게 지우래? 만약에 네 마누라가 당하는 걸 직접 보지 못했고 그 후로도 눈치 채지 못했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했겠어?
도법 : 차라리 그편이 나았겠지.
망령 : 그런 어벌쩡한 말이 어딨어. 안 보면 괜찮고 보면 안돼?
도법 : 더이상 듣기 싫어.
망령 : 그럴려면 뭣하러 중이 됐어? 불상은 왜 만들었어? 法을 보려고 했던 거 아냐? 그 법이 여기에 있는데, 넌 지금 어디서 찾고 있는 거야 이놈아!
(이만희 희곡집 1, 도서출판 월인, 1998년 10월 인쇄)
세상사 마음 먹기 달렸단 말, 참 쉽게도 내뱉고 그게 뭐 별 거냐는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당해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목탁'에서 도법이 자신의 망령과 끝없이 논쟁하면서도 결국 이 화두의 답을 제대로 얻지 못하는 것은 '일체유심조'의 경지를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뭐 달리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 경지에 이르렀으니 자살한 거 아니냐고.
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별로 바람직해보이진 않고. 일체유심조, 쉽진 않다. 그래서 화두로 삼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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